본문
퇴계 이황의 후손, 이육사를 찾아가다
'이육사문학관'
이육사는 일제강점기 시절, 식민지 통치에 항거한 독립운동가이자 문학인입니다.
이육사문학관은 평생의 소원으로 독립을 외치던 그의 생애와 유품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생애를 살며 시 34편, 평론 11편, 수필 13편, 번역물 2편을 남긴 이육사가
문학 활동을 시작한 1930년대는 한글의 교육을 말살하고 일본어를 강제적으로 배우게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식 성과 이름을 갖도록 강요하던 창씨개명이 있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이육사의 시가 저항적인 이유는 일제 강점기라는 열악한 시대적 상황에 맞서기 위해 갈등하는 인간의 내면을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본명이 이원록인 이육사는 선비의 혈통, 퇴계 이황의 14대 후손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유교문화의 중심지이자 독립운동의 역사를 담고 있는 안동은 이육사에게 고향 그 이상의 도시입니다.
선비의 올곧은 뜻과 삶의 틀을 갖춘 안동에서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운
그는 대구와 영천, 더 나아가 외국에서 신학문을 배울 만큼 영특했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을 하며 새로운 지식을 배우려는 노력은 견문을 넓히고자하는 선비의 자세덕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유학 생활이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본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을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육사가 독립운동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장진홍 의거’에 관련되어 1년 7개월동안 감옥살이를 할 때 받은
수감 번호 264를 자신의 호로 삼아 일본에 대한 저항감과 독립에 대한 사명을 표현한 것입니다.
살아생전에 어디서든지 자신을 이육사라고 소개할 만큼 당당했다고 합니다.
이육사는 미래에 대한 고찰에 빠지게 되고 또 한 번의 큰 결심을 내립니다.
시와 글을 통해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귀국을 한 뒤 언론활동과 무장독립운동을 함께 겸하던 그의 마지막은 허무했습니다.
베이징에서 국내로 무기를 반입하려다가 어머니와 형의 제사를 위해 귀국길에 체포되었기 때문입니다.
꿈에 그리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중국으로 압송되어 결국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시대에
문학과 독립운동으로 온몸을 던진 이육사의 숭고한 선비 정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육사 문학관은 가슴 아픈 과거를 담은 공간입니다.
40년이란 짧은 생애 중 절반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살았던 그의 발자취와 유품을 볼 수 있었던
이곳에서 뜻깊은 시간을 가져봅니다.
이용시간 : 09:00 ~ 18:00
주차공간 : 있음
출처 : 경북나드리
인근여행지
인근 맛집
인근 카페
인근 숙박